마리 앙투아네트 드레스가 왜~
💦 마리 앙투와네트 with Her Children (1787) 💦
오스트리아의 공주 마리 앙투아네트는 동맹을 위해
프랑스의 황태자 루이 16세와 어린 나이 14세에
정략결혼을 하고 베르사유에 입궐한다.
완전히 다른 세상에 들어선 그녀는
새로운 생활에 대한 기대로 설레지만,
소심하고 무관심한 남편과 프랑스
귀족들의 시기심으로 점차 프랑스에서의
생활에 외로움을 느끼고 지쳐만 간다.
사치와 허영 덩어리로 불리며,
프랑스 루이 16의 왕비(1755~1793)이며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이였지만
행실이 나빴으며, 대혁명 때
반혁명파의 중심으로 활약하다
루이 16세인 남편도 단두대서 처형당하였으며
그녀도 여러가지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씌워서
단두대에서 반역자로 처형되었다.
오늘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삶을 조명하기보단
그녀가 사는 동안 입었던 드레스를 보며
그녀의 내면에 감추고 있는 모습에
감정 이입을 해보려한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공주이자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80)
여제의 딸이었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14살에
프랑스의 왕태자(미래의 루이 16세)와 결혼했다.
당시 베르사유는 극히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궁전으로 왕실과 궁정인 들은 이에 걸맞은
복을 입어야 했다.
왕태자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궁정의
어떤 여인보다 호사스러운 차림을 할 수 있었고,
명실공히 베르사유의 패션 리더였다.
그러나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다양한 보조 기구를 입고 배와 허리를
졸라매는 궁정 드레스는 매우 무겁고 불편했다.💦💦
위 그림으로 보는 거와 같이 마리 앙투와네트는
사치스럽고 화려한 패션으로 유명하며,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Marie-Antoinette, 1755-93)는
당대의 패션 아이콘이었다. 그녀가 입으면 유행이 되었고
베르사유 궁정의 여인들은 물론 유럽 전역에서
그녀를 따라 했다.
그녀의 의도가 전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는 국내외 패션 산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왕비가 입고 유행시킨 수많은 패션 중
세상을 바꾼 옷은 다름 아닌 그녀의
가장 겸손하고 허세 부리지 않는 옷이었다.
그 옷은 "모슬린 슈미즈" 란 왕비가 입기엔 다소
소박하고 볼품없는 옷이었다.
1774년 왕위에 오른 루이 16세
(Louis XVI, 재위 1774-89)는
왕비가 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베르사유 궁전의 별궁인
프티 트리아농(Petit Trianon)을 선물한다.
그녀는 영지 내 당시 유행하던 영국식 정원을 꾸미고,
오늘날 ‘왕비의 마을(Hameau de la Reine)’이라
알려진 작은 촌락을 짓도록 했다.
베르사유 안에 작은 저택 "프티 트리아농'에서
그녀의 친구들과 소박하고 조용한 전원생활을 하며
편안한 옷을 입으며 지내길 좋아했다.
갑갑한 베리사이유 궁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도피처엿던 이곳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기가 입고 싶었던 옷을 입으며
마음껏 즐겼으며 낭만적인 환상 속의 시골 아가씨가
입을 법한 옷을 찾기 시작했다.
엄격하고 호화로운 궁정 생활에 지친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티 트리아농에서의 편안한 복장을 즐기면서
뻣뻣하고 무거운 비단보다 가볍고 활동적인
모슬린(짜임새가 섬세하고 부드러운 평직의 면직물)
을 선호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림 속 입고 있는 모슬린 드레스는
바로 그녀가 프티 트리아농에서 생활할 때 입던 비공식
일상 복장이었다.
왕비의 모슬린 드레스는 곧 궁정의 여인들에게도
전파되었지만, 베르사유에서와는 달리 그녀의
새로운 패션은 프랑스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드레스의 디자인과 함께 대중에게 충격을
준 것은 직물 자체였다.
드레스의 소재인 면화는 수입품으로,
최상급 인도산 면직물이 영국의 동인도회사를
통해 유럽으로 전해졌다.
따라서 값비싼 수입 면직 드레스를 입은
왕비의 모습은 비난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프랑스인들에게는 외국인 왕비의 애국심이
결여되어 있는 것과도 같았다.
이런 에피소드도 있었는데~
1783년 엘리자베트 비제 르 브룅은 심플한
흰 면직 드레스를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를 그렸다.
<슈미즈 드레스를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 속 왕비가 입은
드레스는 얇은 천으로 만든 가볍고 느슨한 원피스로,
허리 뒤를 금색 리본 매듭으로 묶어 길게 늘어트렸다.
1783년 살롱전(프랑스 왕립 예술 아카데미에서
개최한 미술전)에 출품된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를
본 관람자들은 흰 면직 드레스를 입은 왕비의 모습이
대단히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왕실의 권위와 격식에 전혀
맞지 않는 복장이었으며, 왕비가 속옷
(슈미즈, chemise – 어깨에서부터 허리 라인을
조이지 않고 일직선으로 내려오는 드레스 스타일로
피부와 바로 닿는 가장 안에 입는 아이템) 차림으로
국민 앞에 나타난 것과 다름없었다.
국민들의 빗발친 비난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는
곧 철거되었고, 비제 르 브룅은 대체 초상화를 재빨리
다시 그렸다.
같은 자세를 취한 푸른 회색빛 비단 드레스를 입은
왕비의 모습은 이전의 초상화보다 자연스러움은 덜하고
어느 정도 거리감이 느껴진다.
‘슈미즈 드레스’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18세기 후반의 패셔니스타들은 왕비의 드레스
입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흰 면직 드레스는 금세 프랑스를 비롯한 전 유럽에서
유행 아이템이 되었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다시 한번 패션 리더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1793년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서 처형된 이후 그녀의 슈미즈 드레스는
본격적으로 세상을 바꾸기 시작한다.
이렇듯 면화 산업은 발전을 거듭했으며
미국서 조면기를 발명함으로 더 많은 노예가
필요했으며 19세기 중반까지 노예제를 존속시켰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입은 단순한 흰 면직 드레스가
가져온 나비 효과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1783년 어느 날, 누구보다 화려했지만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왕비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을 순간,
옷장에서 꺼낸 드레스 한 벌의 선택이
가져올 미래를 그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출처] : [그림속세계사] 세상을 바꾼 마리 앙투와네트 드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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